정부, 단순 배분자에서 정교한 조정자로
기술 캐즘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이제부터 단순한 재원 배분자를 넘어 민간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환경을 설계·지원하는 촉진자이자 조정자로 역할을 전환해야 한다. 핵심은
R&D→실증→조달·민간 도입→표준·확산으로 이어지는 전 주기에 대해 정부는 민간과 수요 주체가 주도할 수 있도록 제도·인프라·네트워크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공공 조달을 통해 기술의 초기 수요를 정부가 직접 만들어주는 방식이다. EU의 PCPPre-commercial Procurement, 한국의 혁신 제품
시범 구매 제도 등이
그 예다. 다만 한국의 경우 혁신 제품 지정과 조달 수요 간 불일치, 평가 체계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실질적 캐즘 극복 도구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SBIR 일부
프로그램처럼 초기 기술에 대해 구매를 전제로 한 조달 연계 메커니즘 도입이 필요하다.
둘째, 실증 특례와 규제 샌드박스의 전략적 운영이다. 2020년 도입된 규제 샌드박스 제도는 자율주행, 원격의료, 핀테크 분야에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실증을 넘어
법·규정 등의 제도 정비로 연결되는 비율은 여전히 낮다. 실증 결과에 따라 규제를 자동 조정하거나, 법제화 경로를 연계하는 제도적 연속성이 필요하다.
셋째, 기술-수요 매칭을 위한 플랫폼화 노력이다. 공공 기술이전 플랫폼은 여전히 단편적이다. 기술 거래의 네트워크를 고도화하고, 수요자-공급자 간 중개자Hub를 육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NEDO를 통해 수요 기업 중심의 매칭형 사업화 구조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는 기술이 시장 요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조정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넷째, 기술 수용성 제고를 위한 사회적 신뢰 형성이 필요하다. 기술에 대한 윤리적·사회적 논란은 기술 캐즘을 증폭시킨다. AI, 유전자 편집, 로봇 등에 대한 신뢰 회복과 사회적
수용성을 위한 가이드라인 및 시민 참여형 R&D 설계가 병행되어야 한다.
다섯째, 위험 분산형 금융·세제 제도의 도입이다. 고위험 기술을 위한 공공 VC, 기술보증기금, 이자 보전형 융자 등 정부의 투자 리스크 공유 구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최근
정부는 ‘딥테크 특화 펀드’, ‘기술 가치 보증 강화 방안’ 등을 추진하고 있으나, 이를 기술사업화 단계별로 정교하게 차등 적용하는 전략이 요구된다.
기술 캐즘은 모든 기술 분야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 아니라, 특히 시장 수용과 확산 과정에서 구조적 간극이 큰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이 현상은 기술 자체의 한계가
아니라 사회·제도·수요·자금·시간의 불일치가 복합적으로 얽혀 나타나는 구조적 문제다. 한국처럼 기술 창출 역량은 충분하지만 일부 분야에서 시장화 역량이 미진한 경우, 캐즘 구간을
통과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된다.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정부 개입’이 아니라, 해당 기술 분야의 특성 및 시장 환경에 맞춰 정교하게 설계된 지원과 조정이다. 정부는
캐즘을 일시적 난관이 아닌 전략적 대응이 필요한 ‘구조적 병목’으로 인식해야 하며, 발생 가능성이 높은 분야에서는 민간이 도약할 수 있도록 연결의 다리를 놓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술 강국 대한민국으로 향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