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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시장에 닿기까지,
캐즘을 건너는 정부의 길
김선우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중소‧벤처기술혁신정책연구센터 센터장

새로운 기술이 실험실을 벗어나 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한다. 바로 ‘캐즘Chasm’이라 불리는 시장과 혁신 사이의 간극이다.
이는 기술뿐 아니라 제도, 수요, 자금이 얽혀 있는 구조적 문제다. ‘한국형 캐즘’ 돌파를 위한 정부의 역할을 살펴본다.

연구개발과 시장 사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기술이 연구실의 실험 단계를 벗어나 시장의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 새로운 위기가 시작된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한계나 자금 부족이 아니라, 기술이 대중의 신뢰를 얻고 실제 수요자에게 도달하기까지의 ‘간극’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제프리 무어Geoffrey A. Moore는 <제프리 무어의 캐즘 마케팅Crossing the Chasm>(1991)에서 이를 혁신 수용자와 전기 다수 수용자 사이의 기대·행동·신뢰의 단절로 정의하며, 기술사업화 과정의 최대 난관이자 ‘시장화의 목구멍’이라고 설명했다.

캐즘 현상은 단순한 기술 확산 곡선의 과도기가 아니라, 기술의 사망률이 가장 높은 구간이기도 하다. 수많은 유망 기술이 연구개발 성공 이후 사업화 문턱에서 좌절되고 사라졌다. 구글 글라스Google Glass, 세그웨이Segway, 삼성전자의 전자종이와 같이 기술적 완성도가 높음에도 시장에 안착하지 못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반면 스마트폰, 전기차, 태블릿 같은 기술은 적절한 수요 창출, 산업 생태계 구축, 제도 정비를 통해 캐즘을 넘어섰다.
한국은 정부와 민간을 합쳐 세계 최고 수준의 R&D 투자 비중(GDP 대비 4.94%, 2023년 기준)을 기록하고 있으며, 상당한 과학기술적 성과를 거두고 있음에도 기술사업화율은 OECD 평균을 밑돈다. 이는 기술 창출과 수요 연계의 단절, 초기 시장 부재, 규제 병목 등 복합적 구조가 ‘한국형 캐즘’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다수의 공공·민간 연구개발 과제가 논문·특허 등을 포함한 단기 성과 위주로 설계되어 장기적 사업화 가능성이 약화되고, 공공과 민간이 보유한 기술은 수요처와 연결되지 못한 채 기술료 회수나 기술이전이 실패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은 실정이다.
완성도 높은 기술도 대중의 기대와 신뢰를 얻지 못하면 캐즘에 머문다. 사진은 사업화 문턱에서 좌절된 구글 글라스.
기술 캐즘을 키우는 구조적 병목들
기술 캐즘 현상이 발생하는 몇 가지 공통 요인으로 연구개발 활동에 따르는 인센티브 불일치, 실증과 제도 정비의 단절, 수요 기반 조달의 미흡, 현금흐름의 계곡 등이 지적된다. 첫째, 인센티브 불일치 현상은 공공 R&D의 경우 투입·산출 중심 지표(논문, 특허)에 편중되고, 민간 R&D는 초기 사업화 구간의 불확실성을 투자 관점에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발생한다. 둘째, 실증과 제도 정비의 단절은 규제 샌드박스와 실증 특례제도가 도입되었지만, 실증 이후 자동 규제 조정이나 표준화로 이어지는 구조가 약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셋째, 수요 기반 조달의 미흡은 초기 레퍼런스 매출이 없는 상태에서 민간 수요가 형성되기 어려우며, 공공 조달도 과업 발주보다는 사양 지정에 치우쳐 혁신 제품의 확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현금흐름의 계곡 문제는 기술은 확보되었으나 생산·인증·유통 체계를 구축하기 전까지 자금 공백이 발생하므로, 이 구간에서 정책금융과 민간자본 간 역할 분담이 불충분하면 캐즘이 심화된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해외 사례는 다음과 같다. 미국의 SBIR/STTR 제도는 기술성숙도 3~6구간 기업에 지분 비희석 자금을 공급하고, 일정 전환율 및 사업화 성과를 의무화하여 ‘연구-시장’ 인센티브를 정렬하고 있다. 영국의 SBRI는 문제정의 기반의 단계형 공공 조달로 초기 레퍼런스 시장을 창출하며, EU의 PCP는 실증→표준화→확산을 제도 루프로 설계하고 있다. 미국 ARPA-E는 과제 단계부터 ‘Tech-to-Market’ 기능을 내장해 사업화 전담팀이 고객 발굴과 규제 대응을 병행한다. 일본 NEDO는 수요 기업 중심 매칭과 상시 문제해결 구조를 통해 실증 병목을 해소하며, 이스라엘은 ‘요즈마 2.0’으로 공공자금을 레버리지 삼아 민간 장기자본을 초기 시장에 유입시켰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 ❶ SBIRSmall Business Innovation Research : 중소기업 혁신연구 프로그램/STTRSmall Business Technology Transfer : 중소기업 기술이전 프로그램.
  • ❷ SBRISmall Business Research Initiative : 중소기업 연구개발 프로그램.
  • ❸ PCPPre-Commercial Procurement : 정부나 공공기관이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혁신 기술이나 제품 R&D 서비스를 민간 기업으로부터 단계적으로 구매하는 제도.
  • ❹ ARPA-E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 Energy : 미국 고등에너지연구계획국
  • ❺ NEDONew Energy and Industrial Technology Development Organization : 신에너지·산업기술종합개발기구
해외 지원제도 사례
정부, 단순 배분자에서 정교한 조정자로
기술 캐즘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이제부터 단순한 재원 배분자를 넘어 민간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환경을 설계·지원하는 촉진자이자 조정자로 역할을 전환해야 한다. 핵심은 R&D→실증→조달·민간 도입→표준·확산으로 이어지는 전 주기에 대해 정부는 민간과 수요 주체가 주도할 수 있도록 제도·인프라·네트워크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공공 조달을 통해 기술의 초기 수요를 정부가 직접 만들어주는 방식이다. EU의 PCPPre-commercial Procurement, 한국의 혁신 제품 시범 구매 제도 등이 그 예다. 다만 한국의 경우 혁신 제품 지정과 조달 수요 간 불일치, 평가 체계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실질적 캐즘 극복 도구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SBIR 일부 프로그램처럼 초기 기술에 대해 구매를 전제로 한 조달 연계 메커니즘 도입이 필요하다.

둘째, 실증 특례와 규제 샌드박스의 전략적 운영이다. 2020년 도입된 규제 샌드박스 제도는 자율주행, 원격의료, 핀테크 분야에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실증을 넘어 법·규정 등의 제도 정비로 연결되는 비율은 여전히 낮다. 실증 결과에 따라 규제를 자동 조정하거나, 법제화 경로를 연계하는 제도적 연속성이 필요하다.

셋째, 기술-수요 매칭을 위한 플랫폼화 노력이다. 공공 기술이전 플랫폼은 여전히 단편적이다. 기술 거래의 네트워크를 고도화하고, 수요자-공급자 간 중개자Hub를 육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NEDO를 통해 수요 기업 중심의 매칭형 사업화 구조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는 기술이 시장 요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조정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넷째, 기술 수용성 제고를 위한 사회적 신뢰 형성이 필요하다. 기술에 대한 윤리적·사회적 논란은 기술 캐즘을 증폭시킨다. AI, 유전자 편집, 로봇 등에 대한 신뢰 회복과 사회적 수용성을 위한 가이드라인 및 시민 참여형 R&D 설계가 병행되어야 한다.

다섯째, 위험 분산형 금융·세제 제도의 도입이다. 고위험 기술을 위한 공공 VC, 기술보증기금, 이자 보전형 융자 등 정부의 투자 리스크 공유 구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최근 정부는 ‘딥테크 특화 펀드’, ‘기술 가치 보증 강화 방안’ 등을 추진하고 있으나, 이를 기술사업화 단계별로 정교하게 차등 적용하는 전략이 요구된다.

기술 캐즘은 모든 기술 분야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 아니라, 특히 시장 수용과 확산 과정에서 구조적 간극이 큰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이 현상은 기술 자체의 한계가 아니라 사회·제도·수요·자금·시간의 불일치가 복합적으로 얽혀 나타나는 구조적 문제다. 한국처럼 기술 창출 역량은 충분하지만 일부 분야에서 시장화 역량이 미진한 경우, 캐즘 구간을 통과하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된다.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정부 개입’이 아니라, 해당 기술 분야의 특성 및 시장 환경에 맞춰 정교하게 설계된 지원과 조정이다. 정부는 캐즘을 일시적 난관이 아닌 전략적 대응이 필요한 ‘구조적 병목’으로 인식해야 하며, 발생 가능성이 높은 분야에서는 민간이 도약할 수 있도록 연결의 다리를 놓아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술 강국 대한민국으로 향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정부의 전략적 대응이 기술을 시장으로 이끄는 다리가 된다.
김선우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중소·벤처기술혁신정책연구센터 센터장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으로, 2022년부터 중소·벤처기술혁신정책연구센터의 센터장을 맡고 있다.
기술 기반 창업, 스케일업, 중소기업 혁신 활동, 대학 및 출연연의 기술사업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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