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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Story>History
신기술 보급의 발목을 잡는 덫,
캐즘Chasm
이동훈 과학 칼럼니스트

한때 ‘얼리어답터Early Adopter’가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신제품이 나오면 누구보다 먼저 써보고 리뷰를 남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또는 그런 행위를 의미했다.
하지만 자기 돈 내고 산 신제품이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거나, 막상 큰 쓸모가 없어 구석에 처박히는 일도 그만큼 많았다. 바로 이런 부분이 캐즘의 출발점이다.

캐즘 개념을 대중에게 알린 제프리 무어.
하지만 그 이전에도 이 개념은 이미 연구되어 있었다.
캐즘은 원래 지리학 용어다. 지각변동에 의해 생기는 균열로 인한 단절을 의미한다. 기술계에서는 첨단기술 제품이 소수의 혁신적 소비자가 지배하는 초기 시장에서, 일반 대중에게 확산되기 전 수요가 정체하거나 후퇴하는 현상을 말한다. 캐즘을 넘어서는 제품은 대중화되지만 그렇지 못한 제품은 일부 얼리어답터들의 전유물로 남게 된다.

캐즘이라는 말이 유명해진 것은 미국의 컨설턴트 제프리 A. 무어가 1991년 펴낸 책 <제프리 무어의 캐즘 마케팅Crossing the Chasm>이 계기가 되었다.
캐즘 이론의 숨은 기원
하지만 이 개념을 무어가 처음 생각해낸 것은 아니다. 무어의 책이 나오기 수십 년 전에도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1915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어린이 두 명이 죽은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자동차는 엄청난 신기술이었고, 전체 가구 중 10% 미만만 소유하고 있었다.

교통사고로 죽은 여자아이 마거릿 맥그루의 유족들은 이 기술혁신이 일으킨 사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알았다. 첫 번째 극소수 부류 사람들은 “그 아이의 죽음은 비극이다. 하지만 이는 자동차라는 신기술을 얻은 데서 따르는 부득이한 대가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 소수 부류 사람들은 “그 아이의 죽음은 신기술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와 유족들의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체의 대부분(85%)을 차지하는 마지막 세 번째 부류 사람들은 “그 아이의 죽음은 자동차라는 신기술이 안전치 못하다는 증거다. 그러니 오늘부터 자동차를 영원히 불법화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즉 신기술로 인한 부정적인 결과가 생겼을 때 그래도 신기술을 옹호하는 극소수 사람들이 있는 반면(첫 번째와 두 번째 부류), 대부분은 그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위험성이 매우 낮아질 때까지 신기술의 수용을 미룬다는 것이다(세 번째 부류). 이러한 발견을 한 마거릿 맥그루의 남동생 댄 맥그루는 훗날 오하이오주립대학교 낙농학 교수가 되었다. 그의 동료 에버렛 로저스는 농부들의 신기술 채택 패턴을 관찰, 신기술이 확산되는 방식을 연구하고 있었다. 1958년 로저스는 댄 맥그루가 1915년에 관찰한 대중의 반응과 자신이 신기술 확산 모델에 사용한 심리 통계학적 특징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밝혀냈다. 로저스는 맥그루 유족이 접한 첫 번째 부류는 신기술을 모든 사람에게 보급하려는 혁신가, 두 번째 부류는 세상을 바꾸려는 얼리어답터, 세 번째 부류는 일반 대중으로 규정했다.

마거릿 맥그루의 죽음은 그 후에도 계속 다뤄졌다. 1989년 레지스매케나사의 직원 워런 시르칭거는 맥그루의 조카였다. 시르칭거는 동료 직원 리 제임스와 마거릿 맥그루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혁신가와 얼리어답터는 위험을 감수하려 하는데 대중은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으므로 신기술에 대한 반응도 정반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신기술 제품 수용의 경우 초기에는 위험을 감수하는 얼리어답터에 의해 수용이 일어나지만, 이들에게 보급이 끝나고 성향이 완전히 반대인 대중에게 수용돼야 하는 시점에서는 보급이 잘 되지 않는 정체기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갭을 마케팅 캐즘Marketing Chasm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마케팅 관점에서 볼 때 초기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 도움이 되었던 많은 전략이 주류 시장에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제프리 무어는 1990년 당시 레지스매케나사에 근무하면서 마케팅에 관한 책을 쓰고 있었다. 그는 <제프리 무어의 캐즘 마케팅>의 주요 개념을 레지스매케나 사내 자료에서 가져왔으며, 그 과정에서 사측의 허가는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캐즘 이론의 영향
그 때문에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캐즘 이론을 무어가 독창적으로 또는 윤리적으로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캐즘 이론은 업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기술 경영상 기술 수용 주기 측면에서 초기 시장 성공과 대중의 광범위한 채택 사이의 전환점을 알아내고 대응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이론의 틀을 제공했다. 훌륭한 제품을 개발하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고객층을 확보하기 위한 포괄적인 전략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따라 고객 심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사항으로 떠올랐다. 대중은 검증되고 신뢰할 수 있는 솔루션을 원한다. 따라서 초기 성공 이후에는 이들에게 맞는 개발, 마케팅, 판매 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캐즘 이론은 주류 고객이 구매하는 것은 핵심 기술이 아닌 ‘완전 완비 제품Whole Product’임을 밝혀냈다. 완전 완비 제품이란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서비스, 파트너십 등 솔루션 작동에 필요한 모든 것이 포함되는 개념이다. 이로써 기술 기업은 핵심 기술 개발을 넘어 실용적인 다수의 요구를 충족하는 완전 완비 제품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캐즘 이론에 따르면 기술 기업은 처음부터 너무 광범위한 시장에 어필하는 대신 명확하게 정의된 틈새시장을 공략, 교두보로 삼는 것이 유리하다. 틈새시장을 장악함으로써 기업은 명성을 쌓고, 고객을 파악하고, 인접 시장으로 나아갈 시장 입지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략은 제한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하고 추진력을 구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교두보 확보 이후 혁신적이고 빠르게 변화하는 초기 시장에서 좀 더 안정적인 주류 시장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기에는, 기업 전 부서가 캐즘 극복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즉 신기술을 개발하는 혁신가보다는 주류 고객 지원에 필요한 정착자와 안정성을 우선시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캐즘 이론에서 말하는 완전 완비 제품은 핵심 기술(코어 제품)만이 아니라, 대중 고객이 실제로 문제 없이 쓸 수 있도록 보완 요소가 모두 갖춰진 상태의 제품을 뜻한다. 스마트폰, 전기자동차, 클라우드 서비스 등이 그 예다.
캐즘에 빠진 기술의 공통점
캐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기술은 의외로 많다. 현시점 캐즘에 빠져 대중에게 보급되지 못하는 기술의 사례로는 세그웨이, 일부 스마트홈 기기(초기 스마트 온도조절기 등), 자율주행차 등이 있다.

이러한 기술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우선 사용자 행동의 중대한 변화를 요구한다. 상당한 학습 난도가 따르는 사용 방법을 익혀야 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대중은 일반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회피하며, 설득력 있는 이유 없이는 그러한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또한 완전 완비 제품을 제공하지 못한다. 기술만으로는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대중은 뛰어난 핵심 기술은 물론이고 보완 요소를 모두 갖춘 제품, 서비스·지원 및 인프라를 포함하는 제품을 원한다. 즉 완전 완비 제품을 원하는 것이다. 캐즘에 빠진 기술은 이를 제공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초기 전기자동차는 완전 완비 제품의 핵심 요소인 (충전) 인프라 부족으로 인해 캐즘에 직면했다.

지나치게 높은 가격과 그것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제품의 질도 캐즘의 원인이 된다. 대중은 가격에 매우 민감하다. 가격 대비 확실한 가치를 제공하는 검증되고 신뢰할 수 있는 제품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세그웨이의 높은 가격은 주류 시장 진입의 주요 장벽이었다.
캐즘의 주요 사례로 꼽히는 세그웨이. 기술적으로는 뛰어났지만, 이걸 왜 사야 하는지 대중을 설득할 만한 부분은 모자랐다.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가치를 제안할 수 없는 기술 역시 캐즘에 빠질 수 있다. 기술이 대중화되려면 대중이 처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능력이 없다면 캐즘에 빠진다.

캐즘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한 경영 컨설턴트의 책에서 비롯된 유행어가 아니다. 20세기 초 자동차 사고에서 드러난 대중의 신기술 수용 심리, 로저스의 확산 이론 연구, 레지스매케나의 마케팅 논의 등을 거쳐 무어에 의해 집약된 결과물이다. 이렇게 쌓인 역사적 맥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기술이 아무리 혁신적이라 해도 대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캐즘을 넘지 못한다. 따라서 기업에게 캐즘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혁신이 시장의 현실과 만나는 순간 반드시 직면하는 전략적 과제인 셈이다.

이 두 사례는 혁신적인 신기술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으며, 고객의 심리를 이해하고 완전 완비 제품을 완성하며 전략적으로 시장을 공략하는 것이 캐즘 극복에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이동훈 과학 칼럼니스트
<월간 항공> 기자, <파퓰러사이언스> 외신기자 역임. 현재 과학·인문·국방 관련 저술 및 번역가.
<과학이 말하는 윤리>, <화성 탐사> 등의 과학 서적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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