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물은 지구 전체 생물량의 80%를 차지한다. 일상 곳곳에서 무수히 많은 초록 잎을 단 나무들을 쉽게 마주친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그 익숙함 때문에 우리는
식물을 잘 모른다.
대부분 초록색이라는 이유로 하나로 뭉뚱그려 보는가 하면, 식물이 생존을 위해 얼마나 치열하고 복잡한 전략을 펼치는지 간과한다.
그 소중함을 잊은 사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에서만 자라는 자생식물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식물의 침묵을 기록으로
바꾼 식물학자들의 책을 통해, 우리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식물의 세계를 함께 살펴본다.
허태임 지음 / 김영사 펴냄
최악의 산불이 한반도를 덮쳤다. 경북 지역에서만 서울 면적의 75%를 태우고 열흘 만에 꺼졌다. 이번 산불은 특히 수많은 생명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 초록이 모두 사라지고 검은 재만 남은 우리 산과 들의 끔찍한 풍경 앞에서, 그 누구보다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을 사람들이 있다. 바로 평생 식물을 연구하며, 그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애써온 식물학자들이다.
현장 과학자만이 전할 수 있는 소중한 이야기
허태임 작가는 식물분류학자다. DMZ자생식물원을 거쳐, 현재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보전복원실에서 우리 땅에서 사라져가는 자생식물을 지키기 위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자신을
‘초록노동자’로 부르며, 1년의 절반 이상을 전국 곳곳의 숲을 탐사하며 식물의 흔적을 기록하는 데 바친다. 그렇게 <나의 초록목록>을 지었다. 일반 교양서에서 보기
힘든, 저자가 직접 관찰하고 밝혀낸 식물의 놀라운 생명력이 가득 담겨 있다.
천선과나무와 천선과좀벌의 관계는 그야말로 동화 같다. 천선과좀벌은 천선과 꽃 안에서 태어난다. 수컷은 암컷과 교미한 뒤 이내 그 꽃 안에서 생을 마감하고, 암컷은 그 꽃을
떠나 다른 꽃으로 날아가 알을 낳는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꽃가루받이가 이뤄진다.
그런데 천선과나무는 ‘기능적 암수딴그루’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암꽃만 피는 ‘암그루’와, 수꽃과 불임의 암꽃이 한 그루에 함께 피는
‘기능적수그루’가 따로 존재하는 구조다. 천선과좀벌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도착한 꽃이 알을 안전하게 품어줄 수 있는 불임 암꽃인지, 아니면 꽃가루를 받아 열매를 살찌우며
자신과 알을 모두 녹여버릴 무시무시한 암꽃인지 알 수 없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꽃 내부 구조는 어떻게 생겼는지, 천선과좀벌이 언제 어떻게 자라는지,
정확히 어떤 시기에 꽃가루를 옮겨서 열매를 맺게 하는지 등은 또렷하게 기록된 바가 없었다. 그래서 저자는 한동안 숲을 조사하면서 천선과를 관찰하는 일에 몰두했단다.
“책에서 배우지 못했던 정보를 현장에서 실제로 만났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정말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암그루는 홑몸으로, 기능적수그루는 천선과좀벌의 알을 품은 대추 모양의
꽃을 단 채 겨울을 난다는 것, 그래서 꽃을 잘라보지 않고도 천선과나무의 암그루와 기능적수그루를 구분할 수 있는 적기는 겨울이라는 것.” (196쪽)
오직 현장 과학자만이 전할 수 있는 소중한 이야기다.
구조된 꼬리진달래가 사는 곳
수목원의 존재 이유가 뭘까?
저자가 영국에서 온 가드너에게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을 소개하며 “이쪽의 꼬리진달래는 석회암 채광장에서, 저쪽의 꼬리진달래는 도로 공사 현장에서 구조했다는 기구한 사연을
알려주었다”(394쪽)는 구절을 읽고는 잔잔한 충격에 빠졌다. 마치 환경파괴로 죽어가던 야생동물을 구조해 보호하는 센터 같지 않은가. 개발로 인해 고통받는 동물에게는 쉽게
동정심을 느꼈으면서도, 그 마음이 얼마나 얕은 것이었는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식물 역시 우리가 보호해야 할, 동물과 다르지 않은 소중한 생명임을.
그렇다고 모든 식물을 수목원에 옮겨서 보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모데미풀’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고 오직 한반도에만 모여 사는 식물인데, 모데미풀이 사는 환경을
인위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모데미풀은 1000m가 훨씬 넘으면서 깊은 계곡을 품고 있는 산을 선별해, 해발고도 500m가 넘어가는 지점의 사람 발길
닿지 않은 계곡을 고르고 골라 뿌리를 내린다.
“청명도 한식도 한참이나 지나고 곡우 즈음해서, 산중의 계곡에도 일조량이 늘어 볕은 차츰 따뜻해지는데 해빙은 더디게 진행되어 잔설과 온기가 오묘하게 공존하는 그 역설적인
자리에 삶터를 이룬다.” (307쪽)
이렇게 까다롭기 때문에 본래 터전인 자생지를 반드시 지켜줘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모데미풀이 사는 곳을 샅샅이 찾는다. 그러고는 보고서에 꾹꾹 눌러쓴다. 개발과 남획 등에
대비한 철저한 사전 보전대책 수립이 필요하다고. 그들을 살리고자 하는 일종의 구호작전이다. 그럼에도 애통하게도, 우리는 너무나 허무하게 모데미풀을 잃고는 한다.
“2014년을 전후로 몇 년간 모데미풀의 서식지 환경에 대한 모니터링 조사를 했던 장소가 그 산에 있었다. (중략) 몇 해 전에는 도로 확장 공사를 했다는 소식도 들렸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해보니 그들 자리는 완벽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311쪽)
식물은 말이 없지만, 저자가 그 침묵을 기록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라지는 것들을 관찰하고, 생존의 조건을 추적하며, 그들이 남긴 흔적을 체계화한다. 그 과정을
통해 독자는 식물 보전이 단지 특정 전문가만의 영역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책임의 일부임을 인식하게 된다.
산불이 천선과나무와 꼬리진달래와 모데미풀도 할퀴었을까. 작가의 말을 빌려 염원해본다.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니기를, 재난을 피해 또 다른 거처에 성공했기를, 재회라는 희망을
마음속 깊이 빌고 또 빈다.”
#식물분류학자#한국식물학자#모데미풀#초록노동자#국립백두대간수목원
김진옥, 소지현 지음 / 다른 펴냄
끝내 진화하여 살아남고 마는 식물 이야기
식물은 참으로 경이로운 생명체다. 그 정수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펼쳐보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꽃 ‘타이탄 아룸’부터 지구 역사상 가장 오래된 꽃
‘암보렐라’까지, 이 책에 소개된 모든 식물 앞에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방식에서 한참 벗어난 놀랍고 매혹적인 식물들을 소개하고 있는 셈인데, 과연 미친 듯한 적응력을 엿볼 수 있다. 기이하고 교활하게, 기발한
아이디어로 끝내 진화하여 살아남고 마는 식물 이야기. 단 하나도 놀랍지 않은 것이 없다. 또렷하게 구분되는 특징을 보여주는 아주 예쁜 일러스트도 함께 수록되어
있어 보는 즐거움도 크다.
급변하는 오늘날의 환경에서도 식물들은 놀라운 적응력으로 살아남을까? 독자를 휘어잡는 흥미로운 이야기 끝에, 깊고 긴 고민을 남기는 책이다.
#극한식물#한국식물학자#식물일러스트

로빈 월 키머러 지음 / 하인해 옮김 / 눌와 펴냄
작지만 우아한 식물, 이끼가 전하는 지혜
앞서 소개한 <나의 초록목록>의 저자 허태임 박사는 “이끼는 포자로 번식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그 수를 늘리는 것이 쉽지 않다”며, “상업적으로
거래되는 그 많은 이끼매트를 얻기 위해서는 일부를 자연에서 채취할 수밖에 없는 노릇인데, 그 많은 이끼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왔을까”라며 우려했다.
그런 그가 ‘아껴 읽었다’며 소개한 책이 바로 로빈 월 키머러의 <이끼와 함께>다.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의 여성 식물학자인 키머러는 이 책에서 이끼
채취는 결코 지속 가능할 수 없는 행위이며, 이와 함께 숲의 호혜성, 즉 자연과 인간이 주고받는 관계 역시 사라진다고 경고한다.
모두가 더는 방관자로 남아서는 안 된다고. 우리 삶의 태도를 되묻게 한다. 책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독서, 사유가 확장되는 경험을 해보자. 키머러는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향모를 땋으며>를 쓴 저자이기도 하다.
#이끼#로빈월키머러#생태#숲의호혜#향모를땋으며




과학 대중화를 위해 설립된 재단법인 ‘카오스’는 주기적으로 시리즈 강연회를 연다. 2022년 봄 강연 주제는 ‘식물행성’이었는데, 식물에 관한 흥미롭고 유익한 영상들이 유튜브 채널에 공개되어 있다. 주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웜업 영상과 실제 과학자들의 인터뷰 영상을 함께 볼 수 있다. 식물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출발점이다.
#카오스강연#진화#나무와숲



그림으로 읽는 식물의 세계, 식물세밀화
식물의 조직을 정확히 구분하고 이해하기 위해 식물을 쉽게 표현한 과학적 그림, 바로 ‘식물세밀화’다. 신혜우 박사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는 식물학자이자, 영국왕립원예협회의 식물세밀화 국제전시회에서 2013, 2014, 2018년 연속 금메달을 수상한 식물세밀화가이자, <식물학자의 숲속 일기>와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과학과 예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식물을 그리는 손길은 그 자체로 하나의 탐구다.
#식물학자의숲속일기#식물세밀화#식물도해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