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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Story>Film&Tech
영화 <슬립 딜러>에서 내다본
2020년대의 그늘
이경원 과학 칼럼니스트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위해 기술을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기술만으로는 더 나은 삶을 보장할 수 없다.
그런 점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영화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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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
이번에 다룰 영화는 알렉스 리베라 감독의 2008년 작 <슬립 딜러>다. 이 영화는 점잖게 말하면 ‘B급 감성이 넘치는’ 영화고, 빈말로라도 만듦새가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초점이 어딘가 좀 안 맞는 듯한 푸르딩딩한 화면은 1980년대 한국 영화를 연상케 하고, 줄거리는 전혀 긴장감을 주지 못한 채 느리게 풀려간다. 그렇다고 액션이나 연기 등 볼거리가 뛰어나지도 않다. 훨씬 잘 만든 영화에 익숙해진 우리 눈에는 심심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고른 이유는 분명하다. 그런 엉성한 짜임새 속에 당대와 가까운 미래에 대한 시각을 꽉 짜 넣었다는 점이다.

영화의 주인공 메모 크루즈(루이스 페르난도 페냐 분)는 멕시코의 시골 마을 산타아나 델리오에 사는 청년이다. 미국 기업 델리오워터사가 세운 댐 때문에 마을에는 물이 끊기고, 농사를 위해 필요한 물도 델리오워터사에 돈을 내고 사야 한다. 메모는 통신망을 해킹하며 미국을 비롯한 외부 세계에 대한 동경심과 호기심을 충족시키지만, 어쩌다가 델리오워터사의 보안 통신을 해킹하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델리오워터사는 해킹범을 제거하겠다며 무인기를 보내 메모가 집을 비운 사이 메모의 집을 폭격하고, 불타는 집에서 뛰쳐나온 메모의 아버지도 사살해버린다.

순식간에 집도 아버지도 잃은 메모는 일자리를 얻어 남은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티후아나시에 간다. 메모는 거기서 만난 여성 작가 루즈 마르티네스(레오노어 바레라 분)의 도움으로 취직한다. 메모가 하는 일은 티후아나에서 미국의 산업용 로봇을 원격조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즈가 메모에게 숨기는 사실이 있는데….
영화 속 스마트 생산기술들
이 영화는 그리 큰 흥행을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꼼꼼히 뜯어볼수록 제작진이 당시 진행되고 있던 기술적 발전과, 그것이 불러올 미래상에 대해 정확히 예측하고 있는 것 같아 놀랍다. 이달의 주제 ‘AI 팩토리’에 필요한 기술인 스마트 생산에 대한 점도 그렇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미국 본토의 생산 활동을 하는 데 사용한 기술들은 영화 개봉 이후 근 20년이 지난 현재 산업 현장에서 활발히 사용되거나 도입 초기 단계다.

우선 원격제어 및 텔레프레즌스Telepresence 기술을 들 수 있다. 원격 현장감 기술로도 번역되는 텔레프레즌스 기술은 사용자의 감각에 자극을 제공해 실제 위치가 아닌 다른 장소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거나 영향을 주는 기술이다. 이는 이 영화에 묘사되는 각종 기술 중 가장 빠르게 실용화되었다. 다만 현실에서는 영화처럼 신경에 직접 연결하지 않고 컨트롤러와 VR을 이용한다.

원격제어 및 텔레프레즌스 기술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여러 가지 이유로 실제로 가기 힘든 곳에 로봇을 보내 원격조종하는 데 사용된다. 실례로는 의사가 의료 로봇을 이용해 멀리 떨어진 환자를 수술하거나, 사고 현장이나 심해·우주 등 인간이 가기 위험한 곳에 로봇을 보내 원격으로 조종하는 데 쓰인다. 영화에서 델리오워터사가 무인기를 이용해 메모의 집을 파괴한 것도 이러한 기술을 이용한 셈이다. 실제로 미군을 비롯한 여러 나라 군대에서 21세기 초를 시작으로 무인기 등의 원격조종 군용 로봇을 활발히 운용하고 있다.
또한 주인공들의 신체 움직임이 산업용 로봇의 움직임에 그대로 반영되는데, 이것은 현실의 기술인 사이버 물리 시스템을 나타낸 것이다. 현실에서는 영화에 묘사된 시스템 속 조종자는 로봇의 디지털 컨트롤러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은 자신의 신경계에 직접 케이블을 연결하고 네트워크에 접속해 이런저런 작업을 수행한다. 이것은 현실 세계 속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BCI, Brain-Computer Interface의 영화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뇌신경계로부터 발생한 신경 신호를 측정·분석해 컴퓨터 또는 외부기기를 제어하거나, 사용자의 의사·의도를 외부에 전달하기 위한 기술이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BCI 기술로는 일론 머스크의 기업 뉴럴링크사의 것이 있다. 최근 임상실험을 통해 생각만으로 컴퓨터 커서를 움직이거나 로봇 팔을 조종하는 단계까지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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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케이블을 연결하고 미국에 있는 산업용 로봇을 원격조종하는 메모.
SF적 문법으로 표현된 현실 속 문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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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사생활을 팔아 돈을 버는 루즈. 현대인의 SNS 중독을 연상케 한다.
현실 세계에 대한 이런저런 비유와 풍자도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로봇을 조종하던 노동자들의 건강이 악화돼 작업 중 쓰러지기까지 하는 장면은, 아무리 생산이 스마트화된다 해도 그 이면에 존재하는 인간의 노고와 희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자신의 기억과 사생활을 네트워크상에서 팔아 돈벌이를 하는 루즈의 모습은 SNS를 통해 열심히 자신을 과시하는 우리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았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현실 세계에 발을 디디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 현실 세계 속 인간의 삶은 누군가가 생산한 재화와 용역에 의해 지탱된다. 이 영화를 보며, 어떻게 해야 그 생산과정을 더욱 인간답고 지속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을 던져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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